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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보다

[도서]「사는게 뭐라고 : 시크한 독거작가의 일상철학」사노 요코 (마음산책,2015)


p22. 천재지변이라도 덮친 것 같다. 재앙이란 이런 걸 두고 말하는 것이다. 한참을 털썩 주저앉아 있어봤자 방법이 없어서 소파로 가서 나자빠졌다. 

p34. 쿄카이도리를 걸으며 의문이 생겼다. 이 길을 걷는 사람들은 당연하다는 얼굴로 지갑에 돈을 넣고 다니는데, 모두들 어디서 돈을 조달해 살아가는걸까. 일해서 돈을 벌어다 주는 사람한테 빌붙어 살거나 돈을 벌기 위해 일하겠지. 부모의 유산으로 한평생 놀고먹는 사람은 정말로 드물다. 다들 건강하기도 하지. 

p38. 내 가족은 텔레비전임에 틀림없다. 채널을 휙휙 돌려 보니 예능 프로뿐이었다. 일본은 요시모토에 점령당했다. 맥아더 장군의 일본 점령 때보다 더 깊숙이 점령당했다. 그런데 저치들은 어째서 항상 저리도 흥분해 있는 걸까. 면전에다 대고 말해주고 싶다.
"이봐 당신들, 좀 조용히 하라고. 대체 뭐 하는 사람들이야? 자기네들끼리만 아는 얘기나 하고 말이지. 전 국민이 다 당신네 패거리라고 착각하지 말라고. 아니, 이미 착각하는 것 같네. 이 나라는 대체 어찌 되려나." 다시 채널을 휙휙 돌려 위성방송으로 미국 뉴스를 틀었다. 

p41. (한국식) 때밀이가 끝난 다음 쑥 사우나에 들어갔다. 젊은 여자가 있었다. 역시 젊은 여자의 나체는 완벽하게 아름답다. 나는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수증기 속에서 젊은 여자의 몸을 관찰했다. 그러다 털이 난 부분에서 깜짝 놀랐다. 젊은 여자의 산은 한여름이었다. 뭉게뭉게 활활 타오르는 젊은 나무 잎사귀였다. 산릉선 같은건 보이지도 않았다. 울창하고 새까맸다. 

p43. 벌떡 일어나서 신경안정제를 한 알 더 먹었다. 나는 약으로 조종되는 인형이다. 

p107. 일본의 맛있는 음식은 거의 다 술안주다. 사사코씨네 저녁 식탁에는 술안주용으로 차린 맛있는 음식이 즐비하다. 아버지가 못 먹어보고 죽은 것 투성이다. 아버지가 좀 더 오래 살았더라면, 요리라면 결코 빠지지 않는 엄마가 도미 다시마절임 정도는 만들어 드렸겠지. 

p111. 점심때까지 물만 마시고, 화장실도 겨우 다녀와 침대에 배를 깔고 엎드렸지만 추잉 껌은 잠들 수 없었다. 점점 무기력하게 밑바닥이 없는 우울로 빠져든다. 아, 무언가 즐겁고 신나는게 필요하다. 지금, 아니 올 한해 동안 내게 즐거움과 행복은 딱 하나밖에 없다. 다 죽어가는 늙은이가 몸을 일으켜, 우유도 사러 가기 싫을 지경인데 슈퍼마켓보다도 먼 비디어 대여점까지 비틀거리며 걸어가게 만드는 그것. 
(생략)
나는 암보다 우울증이 몇 배나 더 힘들었다. 
(생략)
내 우울증은 평생 낫지 않는다. 지금도 앓고 있다. 
암은 덤 같은 것이다. 

p187. 나는 깨달았다. 사람을 사귀는 것 보다 자기 자신과 사이좋게 지내는 것이 더 어렵다는 사실을. 나는 스스로와 사이좋게 지내지 못했다. 그것도 60년씩이나. 나는 나와 가장 먼저 절교하고 싶다. 아아, 이런게 정신병이다.어느 책을 보더라도 스스로를 좋아해야 한다는 말이 나온다. 그런 문장을 볼 대마다 생각했다. '스스로를 좋아하다니 바보같군. 그랬다가는 점점 멍청해질 게 뻔하지. 자기한테 반한 사람은 발전이 없으니까.' 책을 읽을 때 조차 반대편으로 휙 날아가는 것이다. 

p200. 흑심을 품은게 아니다. 닷키나 나가세 도모야 같은 아이돌을 구경하듯 즐거웠을 뿐이다. 그래도 즐거운 마음은 건강에 좋다. 즐거운 마음으로 차에 탄 다음 정신을 차리고 보니 바다가 보이는 곳에 와 있었다. 

p201. 언젠가 등교거부아였던 스무 살의 남자가 말했다. "왕따는 아침에 눈을 뜨자마자 시작되는 거예요. 저녁밥을 먹을 때도 계속 되지요." 나는 이 말을 듣고 놀라서 숨이 멎을 것 같았다. 

p209 '애 낳은 기계' 라는 말을 듣고 히스테리를 부리는 건 여자 체면을 구기는 일이다. 네네, 맞아요, 남자는 단순한 종마랍니다, 기계 보다 못하지요, 모쪼록 힘내세요, 하고 웃으면 될 일을. 

p212. 사람을 무력하다. 그리고 모두들 자신이 좋을 대로 살아가고 있다. 

p244. 아버지는 또, 아무것도 모르는 어린아이에게 말했다. "돈과 목숨을 아끼지 말거라." 그래서 아버지는 가난한 채 쉰 살로 죽었다. 목숨은 지구보다 중하다는 말은 믿을 수 없다.  이라크 아이의 목숨과 장기이식에 몇억 엔이나 쓰는 사람의 목숨은 같지 않다. 나도 목숨을 아끼고 싶지 않다. 

p245. 죽는 날까지 좋아하는 물건을 쓰고 싶다. 예쁘고 세련된 잠옷도 잔뜩 샀다. 보고싶은 DVD도 착착 사들였다. 

 p251. " 나 자신이 죽는 건 아무렇지도 않지만, 내가 좋아하는 가까운 친구는 절대 죽지 않았으면 좋겠다. 죽음은 내가 아닌 다른이들에게 찾아올 때 의미를 가진다."